오장환 (1918~1951)
충청북도 보은 출생. 휘문고에서 정지용 시인을 사사하며 문예활동. 1933년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하며 등단. 《시인부락》, 《자오선》의 동인으로 참여하며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30년대 후반 한국 3대 천재 시인으로 꼽힘. 종로에 출판사 겸 서점 남만서방을 개업하여 문인들과 교류하며 진보적 리얼리즘 시인으로 활동. 일제 강점기에 단 한 편의 친일 시도 쓰지 않음.『성벽』,『헌사』,『병든 서울』,『나 사는 곳』네 권의 시집 발표. 1947년 월북하여 신장병으로 34세의 나이로 사망.
윤동주 (1917~1945)
북간도 명동촌 출생. 연희전문 문과 졸업 후 1942년 일본 릿쿄대학 영문과 입학했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전학. 1943년 항일운동 혐의로 일경에 검거되어 2년형 선고. 광복을 앞두고 28세의 나이로 형무소에서 작고. 특유의 감수성과 서정적 표현,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사색,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진실한 자기성찰의 의식으로 광복 후 다른 유고와 함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시집 간행.
강경애 (1906~1944)
황해도 송화 출생. 평양숭의여학교 중퇴하고 서울 동덕여학교 편입하여 1년 수학. 조선일보 간도지국장 연임. 《조선일보》에 단편소설 「파금」을 발표하며 등단. 치열한 작가 정신으로 식민지 한국의 빈곤 문제를 작품화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 대표작은 『인간문제』,『어머니와 딸』,『제일선』,「지하촌」등.
고한승 (1902∼1950)
개성 출신. 일본 동경 유학 중 신극연구단체 극예술협회 창립회원으로 활동. 아동문학으로 전향하여 1923년 방정환 등과 함께 ‘색동회’ 조직. 1927년 동화집『무지개』발간 후 동화 창작과 구연 활동에 집중. 어린이들의 지위 향상과 복지증진에 힘쓰며 아동잡지 《어린이》 복간 및 운영.
권태응 (1918~1951)
충북 충주 출생.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7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입학. 항일운동으로 퇴학 후 1년간 투옥. 폐결핵 3기의 몸으로 귀국하여 동시 쓰기에 몰두.『송아지』, 『하늘과 바다』, 『우리 시골』, 『어린 나무꾼』, 『물동우』, 『우리 동무』, 『작품』, 『동요와 또』, 『산골 마을』 등 아홉 권의 시집 및 동요집 『감자꽃』 출간. 전쟁 통에 병세 악화로 34세 나이로 작고.
김상용 (1902~1950)
경기도 연천 출생. 1927년 릿쿄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후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근무. 《동아일보》에 「무상」, 「그러나 거문고의 줄은 없고나」 등을 발표하며 등단. 작품으로는 1934년 《문학》에 발표한 「남으로 창을 내겠오」가 유명하나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등 총 3편의 친일 작품이 밝혀짐.
방정환 (1899~1931)
서울 출생. 1920년대를 대표하는 언론․출판인으로 16년간 9종의 잡지 발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소년운동을 전개. 1922년 5월 1일 ‘어린이날’ 제정 및 1923년 최초의 아동잡지 《어린이》 창간. 대표작으로 「만년샤쓰」, 「시골 쥐의 서울 구경」, 「동생을 찾으러」, 「칠칠단의 비밀」 등이 있음.
서덕출 (1906~1940)
울산시 중구 출생. 5살 때 사고로 척추를 다쳐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됨. 정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고 어머니에게서 한글을 배워 동요를 짓기 시작. 1925년 《어린이》지에 동요 「봄편지」 발표. 이후 방정환, 윤석중 등과 교류하며 작품 활동. 작고 10년 후에야 동요집 『봄편지』가 출간됨.
오희창
세종시 부강면 출생. 법무부 이사관, 대전지방 교정청장 역임. 월간 '수필문학' 수필 천료, '문예사조' 시 천료. 한국문협 서울 양천지부 회장. 서울시문인협회 이사. 갈채, 오우회 동인. 저서로 수필집『가을세대의 향기』, 시집 『하늘이 기울 때 더 큰 가슴으로 온 그대에게 묻는다』, 『불꽃 한 송이』등.
유진오 (1906~1987)
서울 종로 출생. 경성제국대학 예과(豫科)에 입학, ‘문우회(文友會)’를 조직하여『문우(文友)』 발간. 이재학 등과 시집 『십자가』 출간. 일찍이 프롤레타리아 문학관에 동조하여 이효석과 더불어 동반작가로 활동. 작품으로「스리」, 「복수」, 「삼면경」, 「갑수의 연애」, 「가정교사」, 「빌딩과 여명」, 「귀향」, 「여직공」, 「송군 남매와 나」 등이 있음.
이상화 (1901~1943)
경북 대구 출생. 경성중앙학교 졸업 후 1921년 프랑스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유학.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 관동대진재를 겪고 귀국. 《백조》 동인으로 1922년 창간호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창립회원으로 활동. 대구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음.「춘향전」의 영역본과 국문학사 등을 기획하였으나 완성치 못하고 1943년 작고.
허 민 (1914~1943)
경남 사천 출생. 1936년 《매일신보》 현상 공모에 단편 「구룡산」 당선으로 등단. 동아일보 진주지국 기자로 일하였으며, 진주기예학교에서 국사와 동양사를 가르침. 폐결핵을 앓다가 1943년 29세로 작고. 대표작으로 시 「야산로」, 「해수도」, 단편 「어산금」등이 있음.
홍사용 (1900~1947)
경기도 화성 출생. 경성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잡지《백조》 및 극단 ‘토월회’의 동인. 친일 활동을 하지 않은 시인 중 한 명으로 작품으로는 「나는 왕이로소이다」,「봄은 가더이다」등이 유명. 《백조》 간행과 극단 운영에 가산을 탕진하고 서울의 주변과 사원, 친구 집 등을 떠돌다 1947년 폐결핵으로 작고.
채만식 (1902~1950)
전북 옥구 출생. 일본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와세다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했으나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학업 중단. 1924년 《조선문단》에 「세 길로」를 발표하며 등단. 《동아일보》, 《개벽》,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 1943년 친일문학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의 평의원으로 활동. 광복 후 자전적 성격의 단편「민족의 죄인」을 통해 자신의 친일행위 고백. 소설, 희곡, 수필, 평론 등 200여 편이 넘는 방대한 작품을 남김. 대표작으로 단편「레디메이드 인생」, 「치숙」, 장편 『탁류』, 『태평천하』 등이 있음.
백신애 (1908~1939)
경북 영천 출생. 대구사범 강습과 졸업. 경북 최초의 여성 교사였으나 사회주의 여성운동으로 권고사직 당함.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나의 어머니」로 등단. 오빠 백기호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동. 니혼대학 예술과에서 연극에 몰두하거나, 중국, 러시아 등을 다니며 경험한 것을 작품에 녹여낸 색다른 경험의 작가로 작품세계가 매우 다채로움. 대표작으로 식민지 조국을 떠나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방황하는 실향민들을 그린 「꺼래이」, 어린 소년을 사랑하는 화가를 통해 여성의 애욕을 그린 유고작 「아름다운 노을」, 「낙오」, 「광인수기」, 「채색교」, 「정현수」, 「소독부」 등이 있음. 32세 암으로 작고.
김남천 (1911~1951)
평남 성천 출생. 평양고등보통학교 재학시 잡지 《월역》 발간에 참여. 일본 호세이대학 예과 입학 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 동경지회 가입. 평양고무공장 파업 참가 경험을 바탕으로 쓴 「공장신문」, 「공우회」로 등단. 제1차 카프 검거사건으로 실형 선고. 해방 후 임화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 설립. 1947년 말 월북 후 1951년 남로당 사건에 연루되어 숙청. 대표작으로 『대하』, 『물』, 『생의 고민』, 『1945년 8·15』, 『소년행』,『삼일운동』,『맥』등이 있음.